영화배우 정윤희 남편 결혼 조규영 나이 키 프로필 문희 윤정희 남정임

2022. 8. 24. 14:50카테고리 없음

- 과거 여배우 트로이카는 누구??

배우 김수로(48)가 지난 23일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 함께 출연한 선배 김성령(51)에 대해 1970~80년대 신트로이카를 형성했던 정윤희,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손예진'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미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화제다.


이로 인해 정윤희가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올랐으며 자연스럽게 트로이카라는 말도 관심거리로 등장했답니다.

트로이카는 러시아로 '3번째'를 뜻하는 것으로 흔히 3두마차를 말하는 것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톱스타 3명이 판을 휩쓸 때 사용했다.

한국 방송영화사에는 원조 트로이카, 신트로이카가 가장 유명하다. 

==> 문희-윤정희-남정임,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 장악

원조 트로이카는 1960년대 중반이후 한국 영화계를 휘어잡았던 3명의 미녀를 말한답니다.

문희, 윤정희, 남정임으로 각각 다른 매력으로 많은 인기를 모았다.

문희(71)는 시원시원한 눈매의 서구형 미인으로 미워도 다시한번, 카인의 후예, 내일의 팔도강산, 꼬마신랑 등에 출연해 최고스타로 이름을 날린 뒤 한국일보 사주의 장남과 결혼해 또다른 화제거리를 남겼다.

윤정희(74)는 동양적 고혹미가 넘친다는 평을 들었다. 청춘극장, 안개, 독짓는 늙은이 등을 통해 한국영화 한국시대를 이끌었으며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큰 뉴스거리를 남겼다.

결혼과 함께 사실상 은퇴한 문희, 남정임과 달리 윤정희는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주연을 맡는 등 계속해서 영화계와 소통하고 있다.

남정임(1945년생)은 1966년 '유정'으로 데뷔한 이래 결혼교실, 연애탐정, 분녀 등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현대적이고 시크한 이미지의 남정임은 문희, 윤정희와 또 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유방암을 앓던 중 1992년 4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정윤희-유지인-장미희, 신 트로이카  

원조 트로이카가 결혼 등으로 영화판을 비운 사이 신트로이카가 등장, 새로운 시대를 열었답니다.


원조 트로이카가 '참하다'는 이미지이라면 신트로이카는 활달한 도회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들은 정윤희(64), 유지인(62), 장미희(60)다. 이들 중 정윤희를 제외한 유지인, 장미희는 지금도 TV에 출연하고 있다.

정윤희는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한 이후 청실홍실, 얄개시리즈, 꽃순이를 아시나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등을 통해 미모뿐만 아니라 연기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정윤희는 큰 키는 아니지만 어떤 옷도 소화하는 균형미, 동서양을 섞어 놓은 듯한 묘한 매력 등으로 많은 이들이 '한국 역사상 최고 미인' '단군이래 최고 미인' '가장 완벽한 비율의 얼굴'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지미-정윤희-황신혜-김태희로 이어지는 이른바 '양귀비 계보'로도 유명하다. 1984년 결혼 이후 연예계로의 발길을 끊었다.

유지인은 1974년 영화 '그대의 찬손'으로 데뷔했으며 심봤다, 내가 버린 남자, 피막 등 울림있는 영화에 출연했다.
유지인은 세련된 서구스타일을 무기로 영화는 물론 방송드라마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장미희는 스타 등용문이라는 '성춘향전(1976년)'으로 영화 데뷔작을 찍었지만 이듬해 1977년 겨울여자에 출연, 장미희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겨울여자에서 블루진 차림의 장미희는 도시화를 상징하는 청춘의 아이콘이 됐다.

이후 별들의 고향2, 불새, 종점, 애니깽 등에 출연했으며 지금은 KBS2TV '같이 살래요'에서 유동근과 다시만난 첫사랑을 연기하고 있다. 

- 프로필 이력 누구?

본관 이름
압해 정씨
출생 나이
1954년 6월 4일 (68세)

고향 출생지
경상남도 통영시
신체 키 혈액형
158cm, 48kg, O형

가족관계
남편 조규영, 자녀 2남 1녀
학력
당감국민학교 (졸업)
부산혜화여자중학교 (졸업)
부산혜화여자고등학교 (졸업)

종교
천주교
소속사
무소속

데뷔
1975년 영화 '욕망'

대한민국의 여배우로 장미희, 유지인과 더불어 19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다른 트로이카 일원보다도 외모면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70년대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녀로도 유명하다. 트로이카 중 가장 아름다운 외모로 당시 많은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렇다보니 관능적인 배역을 맡는 일이 많아 반 섹스심벌 정도로 대우하는 일이 흔했다. 남성팬들 사이에서는 유지인과 더불어 '누가 더 미인인가'라는 주제로 설전을 자주 벌이곤 했답니다.

전성기 시절 상대배우로 출연했던 남자배우들의 인터뷰나 증언을 봐도, 정윤희를 회고할때 '외모가 굉장히 예뻤다'는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한 원로 카메라맨은 ‘여배우는 어디 한 군데쯤은 흠이 있는데 정윤희는 아무데나 갖다 놓아도 화면에 완벽하게 나온다’고 칭찬했다고 한답니다.

- 과거 유년기

1954년생으로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태어났다. 유년기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초중고 시절을 보냈다. 혜화여고 시절 정윤희는 외모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정윤희의 어릴 때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고교 졸업 후 친구와 같이 대학 응시를 했다. 그러나 친구는 S대 음대에 붙었지만 정윤희는 떨어졌다고. 그 친구에게 경쟁심을 가진 정윤희는 그 친구의 1년 후배가 되기 싫어 미술로 전공을 바꾸었답니다

그래서 그녀가 첫번째로 오디션에 응시한 영화가 1974년 최고 흥행 영화로 유명한 별들의 고향. 그러나 배우 경험이 없던 정윤희였기에 여주인공 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 별들의 고향은 정윤희 대신 안인숙이 여주인공 자리를 꿰차게 된답니다.

- 연예계 활동

1975년 영화 욕망으로 데뷔했다. 원래는 1974년에 바보들의 행진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화 출연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데뷔작인 욕망은 데뷔작이라고는 하지만 영화 크레딧에 정윤희의 이름도 빠져있고 흥행조차 실패하며 또 하나의 무명 여배우로 남나 싶었으나...

정윤희는 2번째로 영화 출연 기회를 맞이한다. 김지미, 윤정희가 거쳐 간 청춘극장의 주연으로 출연한 것이다. 원래 신인 여배우 강경희가 맡기로 한 자리였으나 강경희가 박동명 사건에 연루되어 그 자리에 정윤희가 대신 들어간 것이었다. 비록 청춘극장은 거하게 실패해 버렸지만, 이전의 유명 여배우였던 김지미, 윤정희가 맡았던 배역을 맡았다는 점으로 인해 그녀의 지명도 상승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제과의 전속모델이었던 양정화도 박동명 사건에 휘말리며 계약이 파기당했는데 정윤희가 이 해태제과의 모델 자리를 차지하며 그녀의 얼굴이 더욱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답니다.

박동명 사건으로 인해 얻은 반사혜택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청춘극장으로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은 것뿐만이 아니라 당시 거대 방송사였던 동양방송과 전속 계약을 맺어 활약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정윤희는 동양방송의 인기프로그램인 쇼쇼쇼의 2대 MC를 맡아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 당시 더블 MC였는데, 정윤희의 파트너는 동양방송 전속가수였던 위키리(본명 이한필)였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77년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드라마 ‘청실홍실’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정윤희는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실홍실에서 정윤희는 부잣집 여대생역을 맡아서 여주인공 장미희와 삼각관계를 이루는데 드라마에 나온 정윤희의 세련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그 해에 가장 예쁜 연예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한편, 영화에서는 얄개 시리즈에서 나두수의 누나인 나두주 역으로 출연하며 우스꽝스런 이미지를 소화한다. 나두수가 나두주의 얼굴에 낙서한 장면이 유명하답니다.

흥행 성공을 이끌어냈고, 이때부터 여배우 트로이카의 1인으로 영화계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같은 해, 가수로 데뷔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무렵까지만 해도 연기력이 부족하다고 까이기도 종종 까였으며, 그 때문에 ‘말뚝’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정윤희는 연기력으로 주목받던 장미희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고 한답니다.

1979년에는 유지인과 더불어 영화 실적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녀는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 사랑이 깊어질 때, 가을비 우산속에, 우요일, 꽃순이를 아시나요에 출연했고 이 중에서 사랑이 깊어질 때랑 우요일을 제외하고 무려 1년 만에 4편의 영화를 성공시키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러한 기록은 지금도 보기가 힘들다. 한편, 같은 해인 1979년에 '야, 곰례야' 등 동양방송 드라마들의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정윤희는 순박한 시골 처녀역을 소화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MBC로도 출연 범위를 넓히며 드라마에서도 계속 활동을 하는 한편 노출 빈도가 있는 호스티스 소재 영화들부터 ‘사랑하는 사람아’ 같은 멜로물을 오가며 계속 해서 인기 스타로 군림했다. 특히, 1981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하며 동양방송을 이은 KBS에서 MBC로 정윤희가 드라마 출연 범위를 넓힌 일은, 그때까지 공고히 유지되고 있던 방송사 전속 탤런트 제도가 붕괴되는 시초가 되었답니다.

1981년에는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에서 자신만의 매력을 영화에 가득 표현해 내는 한편 여우주연상까지 타내며 연기력 면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토속적인 주제를 다룬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또 다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답니다.


1982년에 성공한 영화로는 여자의 함정이 있다. 애마부인 다음으로 흥행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연속극에서는 코믹연속극 세자매의 막내딸로 출연하여 정동환과 호흡을 맞추었다. 연속극 고백에서는 기존의 연약한 여성상이 아닌 강한 여성상을 보여줬답니다.

드라마에선 발랄한 젊은 여성 역을 맡은 일이 많았으며 CF쪽의 이미지도 이런 드라마쪽 이미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편 정석적인 최루성 멜로물의 여주인공 역도 자주 맡았답니다.

한데 영화 쪽에선 남자들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역할이라 해야할지, 미모 자체가 죄가 되어 주변 남자들에게 성적인 대상이 되어 휘둘리며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되는 역을 맡은 일이 많다. 70년대 후반부터는 당시 영화계 분위기가 노출 장면이 빠지지 않던 분위기여서 출연한 영화에서 노출 장면을 보인 일도 자주 있답니다.

- 다른 미녀들과의 관계 알아보기

예쁜 여자들만 모아놓은 여배우들 중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 덕에 시대에 기록되는 미녀 여배우가 있다. 정윤희 이전에는 김지미가 있었고[10], 정윤희 이후에는 원미경, 황신혜, 김희선, 김태희, 한가인, 손예진, 전지현, 송혜교 등이 미녀 여배우의 뒤를 이었답니다.

그러나 정윤희는 해방 이후 현재까지 여배우의 역사를 살펴봐도 이러한 미녀 여배우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여배우이다. 90년대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나 드라마에서만 성공한 미녀 여배우로는 김희선, 김태희등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 쪽으로는 뚜렷한 성과가 없지만, 정윤희는 영화에서도 성공을 거둔 여배우랍니다.

거기다가 김태희의 경우에는 전성기 시절에는 인기있는 여배우 중 하나의 위치밖에 오르지 못했고, 그녀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여배우들을 누를 정도의 압도적인 인기를 누린 적은 없다. 이와 반대로 정윤희는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에도 유지인, 장미희가 정윤희의 인기를 많이 위협했지만, 한번 정윤희가 제대로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인기에서 이 둘을 크게 눌렀다. 임예진 같은 경우는 하이틴 영화에서의 활약은 두드려졌지만 외모면에서도 정윤희와 비교되지 못했고, 무엇보다 임예진은 성인 이후에는 흥행작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정윤희와 비교하기엔 약하다.[14] 이런 정윤희와 비교해서 외모와 인기 모두 높은 평가를 받는 여배우로는 정윤희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유지인과 90년대 후반을 장악했던 90년대 대표 미녀 배우 김희선이 있었고 정윤희 이후에는 성적면에서 원미경이 영화와 드라마, CF 모두에서 정윤희와 어느 정도 대결을 할 만했답니다.

- 은퇴

1984년 중앙건설 조규영 회장과 결혼하면서 은퇴하였다. 조 회장은 당시 유부남이라 불륜인데, 당시 부인이 간통죄로 고소해서 처벌받았다. 그 이후(1984년 12월) 회장이 전 부인과 갈라서고, 정윤희와 재혼했답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 과거에 당시 기사들이 나와 있다. 조 회장은 이미 부인과 불화하여 별거하고 이혼 절차를 밟고 있는 상태라 주장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83년 4월부터 정윤희를 만나 왔다는 전처의 주장과는 달리, 조 회장은 같은 해 10월 이후에야 정윤희를 만났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10월은 조 회장이 부인과 별거한 시점을 말한다. 즉, 결혼 생활 파탄은 정윤희와는 무관하다는 것. 정윤희 또한 같은 해 12월에 조 회장을 처음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주장했답니다.

또한 실제 통정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도 논란이 되었다. 원래 간통죄는 현장 증거가 있어야 고소가 가능하므로, 전 부인은 정윤희의 집에 자신의 남편이 있는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제출하긴 했는데, 둘이 잠옷 차림이긴 했지만, 남녀 단 둘이 있는 현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가정부, 매니저, 조카, 운전사)도 함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정윤희 측에서는 통정은 없었다고 주장했답니다.

양육비를 조건으로 위자료를 더욱 많이 받아냈다는 기사 내용과는 달리, 어찌된 일인지 전처네 자녀들은 정윤희가 길렀다. 당시 자녀들의 나이가 1~2세 정도였기 때문에 사실상 거의 처음부터 정윤희가 다 키웠다고 봐도 무방하답니다.

결혼과 동시에 연예계를 완전히 떠난 채 방송 출연을 한사코 거절해왔으나, 1993년 남편 회사 중앙산업의 가구 브랜드 '하이츠'의 TV광고 모델로 활동한 적 있답니다.

- 여담과 여러 얘기들

단군 이래 최고의 미녀라는 말도 종종 들었고, 해외에도 유명해서 그녀가 일본에 갔을 때는 일본 영화인 한 사람이 '일본 일류 여배우 100명을 합쳐도 정윤희의 매력엔 못 당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답니다.

언론에서 수애를 정윤희와 비교하는 기사를 종종 올리고는 한다. 한때는 수애가 정윤희의 딸이라는 루머가 떠돌았다고 한다. 그 외에 박진영이 수지를 보면서 정윤희를 떠올렸답니다.

정윤희의 과거 사진을 보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는데, 긴 생머리로 활약한 적이 없다. 이것도 정윤희의 특색이라면 특색. 아무리 길어도 어깨머리가 끝이고 상당 기간을 단발머리로 활동했다. 사실 정윤희가 전성기로 활동한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는 여성들 인기 헤어스타일로 펌이 들어간 중단발이 유행이었던 탓도 있답니다.

- 지난 2011년에 보도된 정윤희 아들의 안타까운 사망

정윤희 아들 사망원인이 밝혀졌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소는 11월 27일 정윤희 아들 조 모씨(22)의 1차 부검결과 사망에 약물복용과 음주에 의해 급성 폐렴증세가 나타난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답니다.


이에 따라 약물 복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사인을 전해 충격을 안겼다. 약물은 마약인지 아니면 평소 복용하던 일반 약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조씨는 지난 22일 친구들과 파티를 열고 술을 마시던 중 급성폐렴증세를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약물이 함께 작용,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윤희 아들은 한국에서 영재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유학, 사립 명문학교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USC)에서 재학중이었다. 하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후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해며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역시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운티 검시소는 타살이나 자살의 흔적은 없다며 약물 복용이 확인된 만큼 독극물 검사를 추가로 실시해 약물이 어떤 것인지 밝혀낼 전망이다. 약물 검사는 대체로 4주~6주 가량 소요, 내년 초 발표될 예정이랍니다.

당초 조씨는 이날 급성폐렴증세로 병원에 입원했고 그날 밤 숨졌다. 조씨는 갑자기 급성 호흡곤란 증세를 일으켜 한인타운 인근 할리우드장로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답니다.

한편 정윤희는 70~80년대 유지인 장미희와 함께 '新트로이카'를 형성하며 최고의 인기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 건설업체를 운영하는 조규영과 결혼, 연예계를 떠났으며 슬하에 2남1녀가 있다. 이 중 정윤희의 자녀는 사망한 조 씨 한 명입니다.

- 지난 2013년 경에 티비조선에 포착된 정윤희의 근황은?

배우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1970년대 트로이카를 형성했던 배우 정윤희의 근황이 공개됐답니다.

30일 방송된 TV조선 '연예해부 여기자 삼총사가 간다'에서는 정윤희의 근황을 공개했다.

제작진은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은퇴한 정윤희를 찾아나섰습니다.

정윤희의 자택 주변 상인들은 "여전히 아름답다"며 "배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전했다.